개고기 식용을 반대하는 이유?

 

종종 TV에서 개고기 식용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쟁에서 사실 개고기 식용 논쟁에서 제가 볼 때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입니다. 그리고 상대편은 왜 돼지와 소는 되고 개는 안되는가를 질문합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그 주장이 상당히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적절한 반론은 논리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논리라는 것은 철저하게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독단적인 세계이고, 머릿속의 가상의 세계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반드시 현실에 대입할 때는 논리의 구성 요소를 현실에 대응을 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각자의 선택에 따르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판단의 근거가 논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특히 이글에서는 공감능력)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 관습에 대해서 반발을 하기도 하고, 일부는 오래된 관습인데 뭐가 문제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인간이 다른 종의 동물을 대하는 태도는 대개 생활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아마도 먹을 것이 없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잡아먹을 것이고 먹을 것이 많다면 자기가 키웠던 동물은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단한 논리도 있을 것이 없습니다. 생명권? 사실 인간의 존엄성 자체도 천부의 권리가 아닌 사회적 약속입니다. 한 때는 부모는 자식을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문화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던 시기도 있었는데, 동물의 생명권이 과연 천부의 권리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 개고기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논리로 접근한다면 어떤 의미로는 의미없는 논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들어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왜 개고기를 먹는 문화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여러 가지 답변을 했지만 이 글에서는 공감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공감은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보노보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인 쿠니라는 침팬지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트와이크로스 동물원에 사는 쿠니라는 이름의 보노보는 찌르레기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야외 사육장의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달려가서 집어 들고 잘 살펴보고는 정신을 잃은 찌르레기가 정신을 차리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쿠니는 정신을 차린 찌르레기를 들어올리더니 두 발로 서게 했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자, 찌르레기를 살짝 던져보았지만,  새는 푸드덕거리기만 할뿐 제대로 날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쿠니는 찌르레기를 손에 쥐고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서,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두 다리로 나무 줄기를 꽉 감싸 잡고 양손에 찌르레기의 날개를 하나씩 잡아 조심스럽게 벌린 다음, 마치 작은 장난감 비행기를 날리듯이 사육장 밖으로 날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찌르레기는 사육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사육장 주변에 파놓은 해자의 둑에 내려앉았습니다. 쿠니는 다른 보노보가 이 새를 잡기 전에 빠르게 나무에서 내려와서 다시 한참 동안 새를 돌봐주었고, 특히 호기심 많은 젊은 수컷들이 함부로 새를 다룰까봐, 이들이 근처에 다가 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사육사는 자리를 떠야했고, 그 뒤에 해가 질 무렵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찌르레기는 보이지 않았고, 사육사는 아마도 잘 날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의 저서 내안의 유인원 (김영사, 2005)에 소개된 사례입니다. 프란스 박사는 쿠니가 찌르레기에게 한 행동은 다른 유인원을 도울 때 보이는 모습하고는 사뭇 달랐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틀에 박힌 본능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신과는 아주 다른 동물이 처한 그 상황에 적절한 도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보호를 제공하는 많은 동물들의 사례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아마도 야외 사육장 곁을 지나가는 새들을 보고서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알았을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공감은 다른 동물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찍이 동물에게서는 보고된 적이 없는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기초적인 동감의 사례는 엄청나게 많아서 당장 TV동물 농장을 찾아서 보면 수 많은 동물들이 종이 다름에도 서로 돌봐주는 것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동감은 뇌에 깊숙히 뿌리 박혀 있습니다.

 

우리의 뇌 속에 동감의 능력이 생각보다 깊숙이 뿌리 박혀 있고 인간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많은 연구가 있습니다. 신경학적으로는 이것은 거울 신경(mirror neuron)에 의한 효과입니다. 만약 남자 친구가 꽃을 집는 모습을 보았다면, 대개 여자친구는 남자 친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합니다. 아마도 그 남자는 미소를 띠우고 그 꽃을 선물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알아내는데 여자들은 깊은 사색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알게 됩니다. 이것은 오래전만 해도, 뇌의 사고처리 능력이 매우 빨라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두자리수 곱셈도 빠르게 하지 못하는 뇌가 이러한 정보를 순식간에 처리한다는 것은 사실 그다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1990년대 초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교에서 이에 대한 아주 흥미있는 실마리를 찾아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원숭이가 의도적으로 손을 뻗어 과일을 집으려 할 때 흥분되는 뉴론들이, 다른 원숭이가 똑 같은 행동(즉 손을 뻗어 과일을 집으려 할 때)을 보기만 했을 때도 같이 흥분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을 거울 신경(mirror neuron)이라고 부릅니다. 거울신경에 대한 학술적인 이야기를 매우 복잡하지만, 이제 우리가 스포츠를 보면서 손이 땀이 나는 이유 등을 설명할 때 이제 거울신경은 빼 놓은 수 없는 부분입니다. 거울 신경은 행동이해, 모방, 의도 이해, 공감 등의 기능을 하고 학습과정에서 필수 요소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그냥 보고만 있는데도 운동신경이 활성화되는 현상이 처음 관찰되었을 때 이 현상은 아주 이상해 보였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타인의 행동을 관찰할 때 운동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한 이미지 정보만으로는 그 행동의 의미나 다른 행동과의 관련성을 알 수 없습니다. 관찰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려면 그것을 운동의 의미 체계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신이 시뮬레이션(가상체험)을 해 봐야 비로소 그 행동의 의미나 의도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기능을 바로 거울신경이 합니다. 시각중추에서 수집된 정보가 거울신경을 거쳐야만, 관찰된 행동을 관찰자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숭이나 인간은 거울신경을 통해서 공감을 해야 상대방의 행동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다른 기능들이 가능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모방입니다. 인간이나 침팬지들은 어미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학습을 하게 됩니다.

 

3. 사이코패스의 동감능력 부족

 

먼저 사이코패스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끼시는 분들도 있고, 사이코패스를 연쇄살인범과 같은 것으로 혼동하기도 하지만, 사이코패스를 언급하는 것은 극단적인 형태이며, 많은 사람들은 사이코패스 성향이 적은 사람에게서부터 매우 심한 사람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합니다. 개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사이코패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동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사이코패스입니다. 현재 가장 인정받고 있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진단법을 제시한 로버트 헤어 박사에 의하면, 인구의 1%가 사이코패스라고 합니다. 다행히도 이런 사이코패스들도 사회생활에 큰 지장이 없고, 범죄자라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비율은 아주 낮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이코패스는 미친 사람들이 아니고, 비이성적인 사람도 아니며 우울증과 같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도 아닙니다. 대표적인 사이코패스인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는 오히려 잘 생기고 지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전혀 다른 관점 즉, 그들은 “몇 가지 능력이 결핍”된 사람들입니다.

 

사이코패스들은, 동감, 공감, 동정, 죄의식, 후회, 진실을 말하는 것, 공정함에 대한 인식등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멋있는 자동차 사진과 칼로 찌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 경우, 일반인들은 이 2가지 사진에 서로 다르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이 두 가지 사진에 대한 반응이 서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게 죽어가는 장면이나, 피를 흘리는 장면과 같은 것을 보고도 심적인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어차피 논리적으로는 본다면 자기가 죽는 것도 아닌데 반응할 이유가 없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병에 걸린 환자처럼 명확하게 진단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성향이기 때문에 성향이 강한 사람부터 성향이 약한 사람까지 연속적으로 분포하고 있고,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사이코패스 성향과 그렇지 않은 성향사이에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이코패스가 흔히 범죄자로 대표될 수 있어서 범죄자들만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이코패스 성향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 많은 집단은 물론 범죄자들도 있지만, 회사의 CEO들 특히 스티브 잡스와 같은 사람들의 사이코패스 성향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아닌 경우가 있어서 그렇지 IT업계의 상당히 유명한 CEO들은 물론이고 경쟁이 치열한 회사의 CEO들은 사이코패스 성향이 매우 높습니다. 경영학에서는 처음에는 이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했지만, 최근에는 이들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스스로 이를 고칠 수 없다는 것에 오히려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범죄자들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존경할 면도 있다는 점에서 비록 이들이 사이코패스 성향이 매우 높아도 그들을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나르시스적인 리더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 연쇄살인범과 같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런 사이코패스들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고귀한 존재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죽어도 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이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에 걸쳐서 발전하면서 살인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대체로 연쇄살인범은 나이가 30대 이상입니다.). 그들은 늑대이고 우리는 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어차피 늑대는 살기 위해서 양을 잡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인간세상도 약육강식의 원리가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화론을 적자생존이 아닌 약육강식으로만 이해합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 3세의 유명한 말입니다. 

 

물거품 같은 꿈 따위에 겁낼 것 없다! 양심이란 비겁한 놈들의 변명이야! 평화와 정의란 가진 놈들이 못 가진 자를 위협하기 위해 꾸며낸 말이야. 이 팔의 힘이야말로 양심이고 칼이 곧 우리의 법이다. 자, 돌격이다. 닥치는 대로 해치워라! 천국에 못 갈 바에야 손에 손을 잡고 모두 지옥으로 가는 거다. 이 가슴 속에 천 개의 심장이 날뛰고 있다. 군기를 휘날려라. 돌격!

[출처] 리처드3세, 장미전쟁|작성자 eun7992

 

4. 공감능력이 없다면 도덕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다윈은 인간의 기원에서 동감, 동감 그리고 다른 도덕적인 본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비자연적인 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바로 사이코패스들이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이들이 비자연적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들이 거울 신경에 의한 동감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동감의 능력이 부족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코패스들에게 도덕을 가르칠 방법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의 기초를 황금률로 생각합니다. 즉 성경에 언급된 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라는 구절이 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표현은 비록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종교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육강식의 방식만을 믿는 사이코패스들은 왜 희생자들인 양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자도 인의 시초를 “측은지심”이라고 했습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것이 인(仁)의 시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그 어떤 행위도 정당하지 못하다고 가르쳤지만 측은지심은 사이코패스는 아예 없는 감정입니다.

 

플라톤은 비도덕적인 인간은 조화롭지 못한 인간이고 조화롭지 못한 인간은 자기 의지로 조절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이코패스가 자기 의지로 조절되지 않고 이들이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봐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비도덕적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을 배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인 사람은 행복할 수 있으며, 도덕이란 일종의 월등함이고 비도덕은 일종의 열등함, 혹은 부족함이고,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가르쳤지만, 사이코패스는 인간본성에 대해서 약육 강식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으로 사이코패스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공리주의자인 벤담과 밀의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도, 사이코패스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할 것입니다.

 

현대 윤리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칸트는 정언명법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명령은,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누구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스스로 생각할 때 다른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명령은,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 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도덕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인격체로서,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에 합당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한다고 했습니다.

 

칸트는 남에게 해가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행동이 보편타당한 원리(maxim)에 근거한 것인지 내적인 동기가 중요함을 말하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사이코패스를 설득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일단 다른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도 어렵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윤리학은 동감의 능력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동감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인간의 윤리학을 도저히 납득시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교육을 통해서 도덕적인 삶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평판을 가르치게 되고 그 악평등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 등으로 그의 행동을 제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연쇄살인범도 감옥에 가기는 싫어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윤리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납득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5. 우리나라 선조들의 자연에 대한 동감.

 

생명은 소중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사례를 모을 수도 있지만, 공자는 조이불망 익불사숙 [釣而不網 弋不射宿] 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낚시는 하지만 필요이상의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은 치지 않으며 화살로 사냥을 하더라도 새집 안의 자고 있는 새, 혹은 새끼를 돌보는 새는 잡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인디언들은 버팔로를 사냥할 때도 사냥한 후에도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졌고, 사냥한 후에는 그들의 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그리고 필요한 양 이상을 잡지도 않았습니다.

 

풍어제를 지내고 산에 올라서 산제를 지내는 과정에서 모두 우리는 필요 이상의 살생은 하지 않으려는 약속을 합니다.

 

 

6. 문화 상대주의

 

문화 상대주의라는 것은 각각의 문화는 모두 그것이 만들어진 환경에서 타당하도록 발전된 것이라서 서로 어느 것이 우월하고 어느 것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문화 상대주의는 매우 조심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보편적인 감정과 정서가 있는데 이것을 지나치게 무시하면 사실 이것도 역시 올바른 관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수 많은 문명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비참한 상황들은 그냥 문화 상대주의로 눈감아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만은 않은 태도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문화만이 우월하다는 관점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몇몇 문화는 인류애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정말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성차별입니다. 중국에서 조차도 우리나라의 여성차별은 유별나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조선시대가 성리학적인 이상에 맞춰서 만들어진 상당히 수준 높고 합리적인 국가였고, 비록 왕권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개인(황제) 소유의 관점으로 바라봤던 중국과는 달리 상당히 민주적인 국가였고 또한 이러한 것을 시도했던 수준 높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하면서 아마도 남녀 비율의 변화 및 피폐된 경제상황때문에 이러한 좋은 면이 사라지고, 많은 악습이 생겼는데, 지금 남아있는 문화가 마치 조선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조선 중반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현저하게 낮지도 않았고, 여자쪽의 제사도 지내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제사에 참여할 수 없다거나, 기타 등등 여러 가지 여성차별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여성차별은 기본적으로 경제사정이 악화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성을 차별할 경우, 아이를 낳기 어렵고, 낳은 아이가 여아일 경우는 병이 걸렸을 때 치료를 안 해주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이 과연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지 항상 살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갓집 며느리가 일 년에 수십번 제사를 지내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명절때 뼈 빠지게 일할 때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놀기만 하는 것, 여자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어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고백을 들을 때, 우리는 과연 그런 전통이 가치가 있는지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고부갈등, 혼수 문제 기타 등등 우리가 버려야 할 수 많은 것들을 모두 전통이라고 껴안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시아 어느 부족은 앞 치아를 뽑아 버립니다. 이것은 질병에 걸렸을 때, 음식을 먹이도록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부족의 여성은 목에 고리를 끼워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목이 길수록 미인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목을 물어 죽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대안일 뿐인데, 새로운 의학이 발달하고 호랑이가 사라져도 이러한 것이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왜 그렇게 만들어졌는지 모르고, 모든 것의 판단 기준에 인본주의가 바탕이 아니라, 관습과 전통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문화 상대주의의 극단에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사이코패스가 많이 닮아있다는 점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동감을 잃어버릴 경우, 괴물이 되어버릴 수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최근에 일부는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남의 문화에 대한 간섭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브리짓드 바르도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보다는 동물 가치만 우선하는 태도를 보여서 빈축을 산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지만, 개고기에 대한 혐오를 가진 나라는 많고 그들은 우리를 문화상대주의로 이해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매우 못살지도 않고 문화 수준이 높은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문화수준이 낮다고 평가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사실상 완전히 상대적이지는 않고 오히려 공통적인 부분이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동물 윤리에 대해서 무관심할 만큼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이 낮다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이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들로서는 타당한 결론입니다.

 

7. 왜 개와 고양이만 특별한가?

 

많은 사람들은 왜 개와 고양이만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개뿐만 아니라, 소와 돼지도 고통을 느낄 수도 있고, 매우 영리하고 특히 소의 경우에 사람과 공감할 수 있음에도 이를 식용으로 하는데, 왜 개만 식용으로 할 수 없는가라고 묻을 때는 사실 답변이 궁색해집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개와 고양이뿐만 아니라, 소와 돼지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돼지도 먹고, 소도 먹기 때문에 개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와 돼지에서 정말로 동감을 느끼고 불쌍함을 느낀다면 이것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동감은 동감대로 느끼지만 이것을 소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현재 소와 돼지고기를 제외하고도 기타 닭이나, 혹은 어류 등을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로는 소와 돼지에 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그 말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물론 약한 수준의 동감은 분명 느낄 수 있지만, 깊은 수준의 개와 고양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동감은 사실 느끼지 못하면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의 수준을 매우 낮추어보고 하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현재 유럽에서는 돼지와 소를 비롯한 가축에 대하여 윤리적이고 동물 복지를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우리는 이러한 것을 아마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8.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합니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동감을 했는가에 대해서 시각이 달라집니다.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들, 영양이 부족해서 힘들어하는 노인들을 생각하고 개를 잡았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도 타당하고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단지 먹을 것도 풍부하고 흔히 말하는 정력제로서의 큰 가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복날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는 이유만으로 개를 잡는 것은, 개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동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진국은 이제 동물의 권리까지 보호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동감의 문화가 더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물 권리는 사실 국내에서도 이미 입법화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개고기도 하나의 문화인데 왜 굳이 남이 눈치를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 보다는 이것이 현대 사회를 우리가 더욱 평화롭게 살아가는 하나의 규범이라는 것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장애인들을 더욱 보살펴 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어야 하는가, 아마도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 충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깊숙이 우리가 동감하는 능력이 있고, 그게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개고기가 맛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오래전 우리 선조들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개고기를 예전에는 개장국이라고 불렀는데, 점잖은 양반들이나, 여성들은 이러한 음식을 먹지 못했고, 그래서 소고기나 닭고기를 대신 사용해서 개장국처럼 만든 것이 육개장입니다. 개장국은 제사상에는 올리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서적으로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왜 부정하다고 생각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개장이 흔한 것을 보면, 아마도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신탕에 대해서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주변에 가난해서 배고픈 채 잠들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개고기를 먹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주변에서 개를 잡아먹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개고기는 이미 다른 육류보다 결코 싼 음식도 아닙니다.

 

왜 우리는 원숭이 골을 먹는 중국의 음식문화를 야만적이라고 주장하고, 당나귀를 산채로 가죽을 일부 벗긴 후 뜨거운 물을 뿌려 익힌 후에 살을 베어내서 먹는 음식(중국의 活叫驴), 최근에 널리 알려진 상어 지느러미 요리(샥스핀)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이제 이러한 잔인성을 드러내는 음식은 세계에서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중입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음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요? 식량으로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미식적인 가치로 수많은 생명이 의미 없이 죽는데, 우리가 그 죽음에 대해서 슬프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 음식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살기 위해서 육식도 해야 하지만 육식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개와 고양이만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을 수가 있지만, 어디 닭이 사람의 말에 길들어지는가요? 그나마 소가 좀 나은 편이지만 개처럼 그리고 고양이처럼 사람과 공감하면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공감을 무시하고 개를 하나의 종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문제는 결코 답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개고기를 찬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개를 잡는 것과 푸아그라를 동급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이 말에 동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과연 거위에게서 개보다 더 강한 동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요? 식량으로서의 가치와 동감의 대상으로서의 두 가지 가치를 가지는 동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고 봅니다. 또한 설사 개와 고양이만 인간과 감정적인 교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소도 그렇고 돼지도 그렇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것으로 부터 내릴 수 있는 가장 타당한 결론은 우리가 식인을 하지 않듯이, 그럼 개뿐만 아니라, 소와 돼지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와 돼지를 먹지 않고도 닭이나, 파충류, 곤충, 어류 등으로 충분히 단백질이 공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만 인간과 감정교류를 할 수 있는 반려동물이 아니라 소와 돼지도 반려동물이라고 하면서 소와 돼지를 먹어야 하듯이 개와 고양이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이 소와 돼지와 충분히 감정적인 교류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이 문제는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고 정서의 문제입니다. 개와 고양이만이 천부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들을 특별한 친구로 다루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이 판단할 때 감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순수이성이라는 칸트의 개념은 완전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이성과 반대의 개념으로 착각하고 보편적인 감정조차도 논쟁 중에 드러내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개고기는 특히 도살과정이 매우 잔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본 외국인은 매우 큰 충격을 받고 이 때문에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개를 도살했을까요? 일부 사람은 그래야 개고기가 더 맛있다고 합니다만, 그것은 다른 동물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도살하지 않는 것을 보면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마 개가 우리와 정서적인 교감을 가질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도살을 본 아이들은 개가 언제든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개에게 정을 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개는 결코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울 것입니다. 개는 항상 사람들이 먹고 남은 것이나 먹어야 하고 간혹 사람의 배설물도 먹어야 하는 동물이라고 가르치기 위한 것일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것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법적으로도 개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도살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한편에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개가 애완동물을 넘어 반려동물이 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는가? 그 답은 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개를 비롯한 많은 반려동물과 동감을 하고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감능력은 뇌속에 깊히 뿌리 박혀 있는 감정으로 그러한 감정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정은 일부의 애견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 깊숙이 자리 잡은 본성이기도 하고 이러한 본성은 우리사회의 윤리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윤리학자들이,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다른 동물을 볼봐주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사람이 육식을 할 수 밖에 없다면 (개인적으로는 채식주의자가 아님) 이러한 고통을 최소화하고 동물복지에 대해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